[단편소설] 귀정

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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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1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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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까스 덮밥, 김치볶음밥, 딸기 샌드위치……. 고민 끝에 은호는 도시락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이번 학기 이후로 저녁을 챙겨 먹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학년이 쌓일수록 인간관계는 점점 좁아졌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공부 거리를 벌리다 보니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2,500원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기다리자니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간을 꾸욱 누르며 준비했던 카드를 리더기에 꽂았다. 삐리릭- 소리와 동시에 카드를 빼고 편의점을 나왔다. 은호의 자취방은 일러도 20세기에 지어진 빨간 벽돌의 빌라 옥탑방이었다. 빌라는 그 주변에서 비교적 높은 5층짜리 건물로써 3분 거리에 떨어진 편의점에서도 옥탑방의 실루엣은 유독 잘 비쳤다. 저곳까지 또 언제 올라갈까, 하며 옥탑방 언저리에 걸려있는 달을 감상하는 것이 귀갓길의 낙 중 하나였다. 그렇게 완연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발을 떼던 때였다. 순간이었지만, 까맣고 작은 점이 달 한 가운데를 지나 떨어지는 것을 은호는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은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빌라 현관에 도착한 은호는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철문 앞에 가늘게 눈을 뜬 아이가 쓰러져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리에서 상황을 파악하길 3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정체불명의 아이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피길 5초. 그렇게 아이의 등 뒤에서 자라나 뜨겁게 맥박치는 박쥐의 날개를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호는 응급차를 불러야겠다고 결심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아이의 작은 손이 은호를 소매를 붙잡았다.
“안 돼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물을 한 모금만….”
은호는 힘을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 정도는 무리 없이 들처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이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올랐으나 옥상에 도착해 가까스로 방문을 열고 아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뉘였을 때에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겨우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돌아보니, 아이는 이미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턱선을 따라 둥글게 말려있는 단발머리는 귀를 덮었고, 격자무늬의 붉고 검은 원피스는 먼지에 더럽혀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별다른 상처가 보이진 않았다.
“너는… 하늘에서 떨어진 거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은호는 후회했다.
“네.” 아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요술에 실패했어요.”

편아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이는 본인을 인간들이 부르는 요괴라고 밝히며 요술을 부리는 도중 의도치 않게 인간계로 넘어와 버렸다고 말했다. 아연이 사용한 요술은 어른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기에 혼자 익힐 수밖에 없었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요술을 시도하다 보니 실수를 해버려 결국 불시착했다고 설명했다. 아연이 다시 요술을 부려 요계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로, 첫째는 아직 불완전한 요술을 완성하는 것이다.
“저는 또래보다야 뛰어난 편이지만, 그래도 요술을 마음껏 쓰기에는 아직 힘들어요. 그러니 요술은 요력이 가장 충만한 때인 달이 뜬 시간에 딱 한 번만 부릴 수 있어요. 앞으로 몇 번만 더 연습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귀가의 두 번째 조건은 집으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다른 누군가-요괴들도 포함해서-에게 아연을 들키지 않는 것이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고 집안을 정리하면서 은호는 계속 들었다.
“여기 인간계에도 많은 요괴가 살고 있어요. 대부분 요괴는 허가를 받고 이곳으로 넘어오지만, 일부 요괴는 인간들 사이에서 몰래 숨어 살기도 해요. 그렇게 인간계로 도망친 요괴들이 어떤 말썽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 곳곳에도 요괴경찰이 숨어있겠죠. 제멋대로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이지만, 경찰에 잡혀 돌아가는 것은 절대 피하고 싶어요.”
 아연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잠시 멈췄다.
 은호는 이야기를 집주해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엉터리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연을 설명하는 내내 아연의 등 뒤에서 펄럭이는 박쥐의 날개를 보니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일반적인 미아라면 동네 파출소라도 데려가서 부모를 찾아주는 것이 도리겠지만, 직접적인 방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요괴경찰에 인계되는 것을 본인이 단호히 거부하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구나, 하고 은호는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자취한 이후에 타인을 집에 들여본 적이 있던가. 가끔 집주인 할아버지가 한 겨울에 터진 배수관을 보거나 벌레 약을 칠 때를 제외하고는 입주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아연을 타인이라고 칭하기에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써, 어른으로서의 존재도 아니자만.
대화가 멈추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시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연은 생수병을 두 병으로 쥔 채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연에게는 크겠지만 옷장에는 잠옷으로 입을만한 옷가지도 있고, 여분으로 쟁여둔 솜이불도 있었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꺼내 아연에게 건네고 2명분의 잠자리를 준비했다. 흘긋 아연을 보니, 눈이 마주친 아연은 응시하던 물병으로 황급히 시선을 되돌렸다.
“그럼, 내일 자정에 다시 시도할 거란 말이지?”
한참 동안 끊긴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잠깐 멈춰서서 말했다. 좁은 집안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던 은호는 그제야 귀갓길에 샀던 도시락을 빌라 앞에 두고 올라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지갑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마친 은호는 신발장 위에 놓인 현관 열쇠도 챙겨야 할까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요 앞 편의점에 다녀올게. 10분이면 충분할 거야. 편하게 있어.”
현관문을 나서며 은호는 말했다. 작은 대답이 들려왔다.

2
올해는 유독 겨울이 따뜻한 것 같다고, 등굣길에 오르며 은호는 생각했다. 귓바퀴에 걸친 이어폰은 과거 청소년기 시절부터 꾸준히 들어왔던 음악을 재생했고, 은호는 인적 없는 골목길의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음악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거리였지만, 한여름 등불 아래 날벌레와 같이 오늘따라 잡생각은 머릿속을 맴돌아 떨어질 줄 몰랐다.
방 냉장고에는 어제 사둔 도시락과 호빵이 보관되어 있었고, 아연에게는 전자레인지의 사용법도 가르쳤으니 평소의 은호로서는 차고 넘치는 호의를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마음속 답답함을 떼어내려는 듯 괜한 기침을 내뱉었다.
1학년 새내기 시절에는 꼭 동기와 함께 등교하곤 했다. 멀리서 통학하는 동기를 위해 동기가 하차하는 정류장까지 가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함께 등굣길에 올라 학교 교수님 얘기, 어제 본 뉴스 얘기, 저번 술자리에서 실수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미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그랬던 그들도 이젠 누구는 고시를 준비하러 학교를 떠나고, 누구는 취업 준비를 위해 휴학을 낸 지 오래였으며, 은호는 음악이 묻지 못한 추억을 상기하며 그때의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던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중앙도서관 1층에 들어섰다. 국내 제일의 대기업의 후원으로 지어진 중앙도서관은 낮에는 유리로 된 외벽을 따라 햇빛이 비치고, 밤에는 내부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곳이었다. 도서관 지하에 자리 잡은 독서실은 천명에 가까운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중앙이 뻥 뚫린 상부보다야 갑갑하지만 자리 사이의 칸막이를 최소화하여 그 정도를 덜어냈다. 독서실 자리를 잡기 위해 학생증을 꺼내든 은호는 무인기에 학생증을 가져다 댔다. 겨우 여섯 자리만 차 있었다. 평소처럼 구석 자리를 예약한 은호는 곧바로 주변을 정리하고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잡념은 시간이 지나도 떨어질 줄 몰랐다.
은호는 머리를 쥐어짜며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인간계와 요계. 요괴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요괴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으며, 인간은 요괴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어쩌다 세간에 퍼진다고 해도 가짜뉴스 내지는 철 지난 만우절 농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은호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듯 요괴는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한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데에 또 다른 요괴가 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은호의 오른쪽 앞자리에서 노트북과 눈싸움을 하는 여자일 지도 모른다. 마른 체형에 긴 생머리와 뿔테안경, 청색 셔츠에 카키색 면바지를 입은 여자일 지도 모른다. 자리에 쌓아 올린 책의 탑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높은 학번일 테다. 그러나 은호가 지긋이 관찰해도 요괴 여부를 판단할 유의미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관찰에 대한 감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전날 아연의 말에 따르면, 인간계의 요괴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숨긴다. 그러나 무언가를 숨기는 일에는 그만큼의 노력과 신경을 들여야 하는 만큼,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마음이 급해질 만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도 모르게 변장이 느슨해질 때도 있다고 한다. 만약 은호가 다니는 학교의 구성원 중에 요괴가 있다면, 그리고 그 요괴의 변장에 대한 신경을 분산시킬만한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매 순간 집중을 요구하는 공간 중에 은호가 접근하기 쉬운 곳은 그다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요괴를 찾아서 무엇을 할 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연이 요술에 성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굳이 숨어 사는 요괴를 찾아내는 것도, 찾아낸 요괴에 요술의 요령을 물어보는 것도, 아연을 소개해주면서 뒤처리를 부탁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시간 낭비가 아닐까.
그래도 은호는 자리를 정리하고 이동할 준비를 했다. 독서실에 들어온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골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전래동화에서나 보았을 요괴가 인간계에 있다는 데에 단순히 호기심이 발동한 것인 셈 치면 마음이 편했다. 그저 궤도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좋은 구실이 생겼다고 은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의 이후 항로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은호가 먼저 이동한 곳은 학교 유일의 운동장이었다. 운동부원이 연습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요괴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은호는 입학하고 처음 운동장을 보았을 때부터 이곳이 웬만한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작다고 동기들과 지나갈 때마다 이야기하곤 했다. 따라서 교내의 모든 운동 동아리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빡빡한 시간표에 따라 항상 운동장을 메웠다. 지금은 이른 아침인 만큼 사람을 관찰하기에는 표본이 적은 도서관보다 나았다.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높이의 난간에서 은호는 운동부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편에는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육상부 학생이 모래 바닥에 그려놓은 트랙을 따라 슬슬 몸을 풀고 있었고, 맞은편 구석에서는 야구방망이와 글러브로 무장한 학생들이 경기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일찍이 등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은호의 등 뒤를 지나가고 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멍하니 난간 너머에 시선을 던지니 육상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두 명이 일직선의 트랙을 따라 달리고, 반대편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람을 지나치면 교대하여 다시 반대편으로 달리는 방식이었다. 두 개의 팀은 서로의 실력을 맞춰 팀을 구성했는지 경기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에, 은호는 저도 모르게 경기에 빠져들었다. 시합의 마지막 주자는 육상부의 부장으로 보이는 여자로서, 유니폼을 맞춰 임은 다른 부원들과는 다르게 혼자만 흰색 줄무늬의 검정 비니와 파란색 삼선 츄리닝을 입고 옆 사람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장은 정면에서 오는 부원과 교대하기 직전 은호가 서 있던 난간을 흘긋 넘겨보더니,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경기는 결국 부장팀이 이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호를 쳐다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그러다 육상부 부장과 시선이 교차할 때면, 부장은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바람에 은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있어 부장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관찰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도서관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해 조금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학생식당을 이용하기 위해 금잔디라고 불리는 풀밭을 지나 경영관에 들어섰다. 눈치 못 챈 사이 추위로 몸이 굳었던 듯, 은호는 학생식당의 따뜻한 공기에 온몸의 근육이 풀리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오스크에서 저렴한 잔치국수를 고르고 차례를 기다렸다. 준비된 식사를 받아들고 평소처럼 구석 자리로 이동하려다 멈칫, 조금 더 중앙에 가까운 자리로 이동했다. 이왕 관찰을 시작한 것, 밥 먹는 시간까지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덕분에 은호가 의자를 당겨 앉고 젓가락을 들자마자 먼 자리에서 먼저 식사 중인 후배를 발견했다. 은호의 새내기부터 2년간 활동한 마술동아리에서 만난 후배로, 커다란 키에 훈훈한 외모의 학생이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저 친구도 곧 졸업반이겠구나 생각할 무렵 아차,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넉살 좋은 미소로 손을 흔드는 후배에게 은호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 답했다. 너무 눈에 띄는 자리에 앉은 탓인가 보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는 후배를 보며, 은호는 어떤 인사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 혹시 바로 퇴식구로 이동하나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그 기대가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굳이 은호의 자리까지 다가온 후배는 본인의 근황부터 시작해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은호는 평소 후배의 성격을 잘 알기에 신경 쓰지 않고 젓가락을 열심히 놀렸지만, 곧이어 잔반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둘은 이후 학생식당 옆 카페에서 각자 커피를 사 금잔디로 걸음을 떼었다.
“그때 동아리 하면서 제가 선배한테 도움 많이 받았던 것 아세요?”
“도움은 뭘, 나도 내 할 일 하기 바빳는걸.”
“아녜요. 제가 해매고 있을 때 먼저 이런저런 트릭도 많이 알려주셨잖아요. 저한테는 아직도 그게 제 주력이거든요.”
은호를 포함한 대부분 부원이 각자의 길로 나아간 반면, 후배는 동아리의 OB로 남았나 보다. 동아리에서 있었던 추억을 하나씩 끄집어내던 둘은 금잔디 한쪽에 돌로 만들어진 무대와 벤치로 별다른 시설 없이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원형극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일 점심시간 원형극장에서는 이제는 학교 명물이 되어버린 교내 이인 조 포크밴드 ‘페더즈’가 버스킹을 시작한다. 마침 페더즈는 무대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선배도 심심하면 언제든 여기로 놀러 와요.” 다른 게 아니라 마술부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곳 원형극장에서 즉석 공연을 겸해 연습하고 있다.
“오셔서 무대 한번 빛내주시는 것도 좋죠. 아직 실력 죽지 않으셨잖아요? 마술주머니로 승부 보는 건 선배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는데.” 실없는 소리는 여전하구나, 하고 은호는 대답했다.
“저는 슬슬 가볼게요.” 후배는 일어서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뵈서 즐거웠어요. 선배님도 여전하신걸요. 후후.”
후배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좀 더 바람을 쐬고 싶었던 은호는 극장에 남았다. 곧이어 공연이 시작됬고, 비둘기와 참새 몇 마리가 그 주위로 날아들었다. 은호는 옴서감서 스쳐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자리 잡고 구경한 적은 없었다. 페더즈는 무대 간이의자에 앉아 히피 스타일의 셔츠를 거의 바닥까지 늘어뜨린 채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소형앰프에서 흘러넘치는 청량한 음색과 부드러운 통기타의 울림은 평화로워 듣기 편안했다.
첫 번째 노래가 끝나고, 페더즈는 각자 무대 뒤에서 쌀알처럼 생긴 뻥튀기를 반 줌씩 집어 오더니 바닥에 흩뿌렸다. 비둘기 관객을 모으는 방법인가 보다. 그렇게 노래 한 곡과 모이 반 줌을 반복하는 와중에, 인간 관객도 계속 모여들었다. 누군가 지휘한 것처럼 사람은 무대 오른편에, 비둘기와 참새는 오니편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주위 나무들에는 까막까치도 앉아 다음 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저희 무대를 보러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노래는….”
페더즈의 여성 보컬과 잠시 눈이 마주친 은호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궤도에서 벗어난 일상이 떠올라 약간의 초조함을 마음에 둔 채 미루고 미뤄온 공부를 하러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오늘따라 은호를 보는 시선이 많아진 것 같았다.

은호는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갔다. 작은 손님도 방에서 기다리겠다, 오랜만에 요리 솜씨를 발휘하러 은호는 동네 1층짜리 마트에 들려 카레 재료와 몇 가지 반찬들을 사 방으로 향했다. 빌라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골목에 숨어있던 작은 놀이터 벤치에서 아연을 발견했다. 아연은 어제의 원피스를 입은 채 벤치에 가만히 기대어 놀이터의 한 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뭐 하고 있었어?” 은호가 다가가 물었다. 예상치 못한 접근에 눈이 동그래진 아연은, 곧 표정을 정리하더니 시선을 내려 앞뒤로 흔드는 발끝으로 옮겼다.
“심심해서 나와 봤어요.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지만요.” 요괴경찰을 의식한 탓이리라.
은호는 짐을 잠시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아 아연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따라갔다. 그곳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중앙에 무언가를 두고 떠들고 있었다. 왁자지껄 시끄럽던 가운데, 이윽고 꼬마 하나가 다리를 뒤로 빼고 자세를 잡더니 팔을 크게 휘둘러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쳤다. 딱지치기를 하나 보다. 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함께 자란 지금 세대의 아이들한테도 딱지라는 게 유행하는구나,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반가운 기분이 드는 은호였다.
“…같이 놀아보는 건 어때? 재밌는데, 딱지치기도.”
“됐어요. 하나도 재미없어 보이거든요.” 아연은 여전히 아래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요괴가 어떻게 인간과 놀 수 있겠어요. 게다가 딱지도 없고.”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던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난 아연을 바라보았다. 아연은 엉덩이를 탁탁 털더니 빌라를 향해 발을 떼었고, 은호는 양손에 봉투를 쥔 채 아연의 뒤를 따락ㅆ다.

다행히 카레는 아연에게도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 입맛을 신경 쓴 메뉴였는데, 잘 먹힌 모양이다. 창밖의 태양은 거의 종적을 감추었지만, 밤이라고 하기엔 아직 하늘에는 불그스름한 노을의 기색이 남아있었다. 아연이 요술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여유가 있기에 은호는 책상 서랍 구석에서 잠가고 있던 마술용 트럼프카드와 동전을 챙겨 식사용 간이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점심시간에 후배를 만난 이후 아연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생각해 둔 작은 이벤트였다.
“아연아, 이게 뭔지 아니?”
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트럼프카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은호의 카드는 마술용으로써의 그 윤기를 이미 상실했지만, 간단한 마술을 하는 데에는 설령 일반 카드라도 충분했다.
“놀라지 마. 인간도 요술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게.” 은호는 빠른 손놀림으로 카드 더미를 섞은 후 아연에게 앞면을 내밀었다.
“이 카드 중에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서 나에게 보여주지 말고 봐바. 그리고 테이블 위에 뒤집어 두면 돼.” 아연은 카드 더미의 중간에서 한 장을 뽑은 뒤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가지런히 무릎을 모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아연이가 고른 카드에 내 요력 한 방울, 아연이의 요력 한 방울을 섞어보자…” 은호는 공중에 손을 휘젓고는 카드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제 셋을 셀 거야. 그 뒤에 다시 카드를 확인해볼까? 하나, 둘, 셋!”
셋과 함께 카드를 뒤집은 은호의 손에는 스페이드 에이스가 그려져 있었고, 아연이 놀라 입을 가린 사이 아연의 귀로 손을 가져다 대자 거짓말처럼 최초에 아연이 뽑았던 하트 둘 카드가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다.
“와… 대단해요!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아무런 요력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것을 보며, 은호는 아연이 지금까지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했던 것에 반해 처음으로 어린애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아연의 뜨거운 관심에 뿌듯해진 은호는 생각나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마술을 보여주었다. 카드, 동전, 젓가락, 빨대, 고무줄… 어떻게 했는지 그 방법을 잊고 있다가도 도구를 손에 쥐는 순간,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실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있다가, 은호의 시야 한 구석에 비친 시계바늘이 11시를 가리킬 즈음에야 요술을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진즉에 되었음을 알아챘다. 아연은 카드를 모아 은호에게 건네고서도 아쉬운 듯 일어서지 않고 뜸을 들였다.
잠시 후 아연은 방문을 열어 옥상으로 나섰다. 은호가 따라나서니 아연은 옥상 중앙에 서서 양팔을 내린 채 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구름이 걷혀 달빛이 드러나고 지상엔 바람 한 점 지나지 않는 순간에, 아연의 온몸으로 은은한 푸른 입자가 모여들었다. 숨겨왔던 날개가 맥박치며 등에서 솟아나 펼쳐지고, 치맛자락과 머리칼은 무풍에 너울거렸다.펄럭임이 점점 심해지고 아연의 발밑에 푸른 빛이 한가득 모였을 때, 돌연 그 빛의 입자들은 신기루처럼 하늘에 날려 사라지고 아연은 힘이 풀린 듯 터벅터벅 은호에게 돌아갔다.
“실패한 것 같아요.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리려나 봐요.” 아연은 푸른 달을 내다보며 말했다.
하는 수 없지, 내일 다시 한번 해보자, 라며 은호는 대답했다. 아연이 뿌린 푸른 입자 몇몇은 옥상에 남아 둘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3
그로부터 수일은 아연에게 처음 마술을 보여준 나로가 같은 하루를 보냈다. 등교하여 아침엔 운동장에, 점심엔 원형극장에, 저녁엔 도서관에서 관찰하며 밤에는 아연과 시간을 보내고 요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관찰을 단 한 건의 제대로 된 소득을 내지 못했고, 요술은 매번 성공할 듯 말 듯 한 순간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자, 은호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첫 실패 이후 은호는 아연이 계속 요술에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은호가 데려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야 문밖으로 내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었다. 아연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임에도 묘하게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여유롭게 즐기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초조해 하지도 않았다. 은호는 내심 아연이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연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지라도, 은호는 인간계에 사는 요괴 하나 정도는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날도 어느 날과 같은 하루를 보내러 은호는 도서관에 들어갔다.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운동장으로 발을 떼었다. 운동장에 도착해 2층으로 올라가 구석 난간에 기대어 있으려니, 부원들이 모여 있는 운동장 벤치 앞에서 먼저 몸을 풀고 있던 육상부 부장이 은호를 보았다. 파란 삼선 츄리닝에 하얀 줄무늬 비니는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부장은 운동장 한편으로 통통 뛰어가더니, 곧이어 2층 계단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부장은 활짝 웃으며 당황하는 은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오늘도 구경하러 온 거야?” 언젠가 대화할 날이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역시 한 무리의 우두머리는 행동력이 대단하구나.
“네, 뭐.”
“혹시 육상부에 관심 있는 거라면 한번 같이 뛰어보지 않을래? 새로운 부원은 언제나 환영이거든.”
갑자기 입부를 권유하는 부장을 보며 은호는 부장에게 괜한 오해를 사벼렸다고 생각했다. 하긴, 요간 이상하리만치 오래 육상부의 모습을 지켜보긴 했다.
“하하…. 아니요, 저는 구경으로 족해서요. 잘 뛰지도 못해요.”
“걱정하지 마! 처음부터 잘 뛰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오늘은 다들 가벽게 조깅만 할 거야. 어때?” 생긋생긋 웃으며 부장은 말을 받았다.
“정말 괜찮아서 그래요.” 신입생 시절의 거절 못 하는 은호였다면 마지못해 부장을 따라갔겠지만, 성장한 은호는 이 정도 권유야 적당히 뿌리칠 줄 알았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굳이 더 권유하진 않겠지만, 그럼 대신 이거라도 받을래?”
부장이 건네준 것은 손바닥 정도 크기의 빨간 복주머니였다. 복주머니 가운데에는 조그맣게 한글로 “귀정”이 은색 실로 자수되어 있었다. 내부는 비어있었다.
“예비 부원에게 주는 선물이야. 사양하지 말고 받아!”
갑작스러운 선물에 은호는 한 번 더 당황했지만, 이내 복주머니를 받아들고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영업할 때 이런 걸 주는 게 요즘 전략인가, 라며 은호는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장은 마치 복주머니를 건네는 서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미련 없이 왔던 길을 총총 되돌아갔다.
점심은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려 했다. 교내 편의점에서 참치 샌드위치와 할인 음료수를 사 들고 검정 봉투에 담아 원형극장 한 편에 앉았다. 시간이 조금 늦었는지 페더즈는 이미 공연을 시작해 있었다.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내고 한 입 베어 물며 관객석을 흘긋 보았다. 요 수일간 관찰한 결과 페더즈는 의외로 팬층이 두터운 듯, 앞의 두 줄에는 마치 지정석인 것처럼 똑같은 사람이 매일 있었다. 또 은호처럼 도시락이나 간편한 점심을 먹기 위해 매일 이곳을 찾는 이들도 보였다. 은호와 같은 고학번이리라. 개중에는 신입생 시절 같은 수업에서 스쳐 지나간 인연들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은 들었으나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은호가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을 즈음, 곡을 마친 페더즈가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빼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마지막은 신곡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 곡을 들어주시는 여러분께,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방황하고 망설이는 분들게 위로와 응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페더즈의 리드보컬은 은호에게 눈길을 던지더니, 이내 의자에 앉아 느리게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꼬불꼬불한 앞머리 사이로 리드보컬의 눈빛이 새어 나왔다. 은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스탠딩 마이크에 입을 맞춘 페더즈의 노랫말은 무대 너머까지 전해질 것만 같았다.

오갈 데 없는 낡은 배 하나
침묵의 밤하늘에 젖은 채
상처에 노 저어 나아가네
목적지도 모른 채 모두 혼자서

아지랑이 항로에 닻을 내리면
여명이 꿈처럼 아득히 느껴지고
흘러간 운명에 뒤섞여 그저
추억을 새기네 이제는 둘이서

그리고 만약 돌아오는 길이 어긋나더라도
그대 곁이라면 그 인생에 감사할 뿐이죠
그리고 만약 잘못된 내일에 다다르더라도
그대 품이라면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죠.
그리고 만약 신조차 우릴 사랑하지 않아도
그대 함께라면, 그 누가 손가락질할 테요
그리고 만약…
…….

원형극장 주위에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새가 모였다. 그리고 은호는 지금껏 무대 곳곳에 떨어져 있는 깃털을 두고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버스킹이 점점 고조될수록 음악에 빠져있던 은호의 눈에는 페더즈의 오른손가락이 기타를 튕길 때마다, 리듬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찰랑거릴 때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까맣고 하얀 깃털이 선명하게 비쳤다.
“저게 무슨….”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다. 실제로 무대 위 나뭇가지에는 까막까치가 오순도순 앉아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깃털은 단 몇 개일 뿐이니까. 하지만 아연의 일을 겪으니,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착각이 아니란 확신만 강하게 들었다. 영상물의 특수효과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은호가 좌우를 둘러보아도 그러한 이변을 눈치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페더즈의 뒤편으로 희미하게 날개가 비칠 찰나, 공연이 끝났다.

페더즈는 무대 직후 은호가 망설이는 사이 어딘가로 가버렸다. 당신은 요괴인지, 혹시 아연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동시에 인간계에 숨어 사는 것일지도 모르고, 이렇게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 또한 무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들이 은호의 추측대로 까막까치 요괴가 맞다면, 그들에게서 아연의 요술을 성공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내 은호는 아연에게 돌아가 이 사실을 털어놓고자 결심하고, 곧이어 발걸음으로 돌려 짐을 챙기러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 내부에는 코끝을 찡하게 할 추위도, 살을 에는 듯한 바람도 없었지만, 은호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어깨를 움츠린 채 재빨리 가방을 메어 출구로 되돌아 나섰다.
“저기, 잠깐만.”
도서관 정문을 나서는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은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까만 가죽점퍼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커다란 키와 어깨에 닿지 않는 미역머리, 그리고 가늘게 위로 솟아있는 눈과 눈썹으로 매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여자는 은호의 소매를 잡아 도서관 옆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잠깐 닿은 여자의 피부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내 눈을 봐.”
여자는 휙 돌아서더니 적잖이 짜증이 쌓인 듯 쏘아붙이며 말을 이었다. 여자의 어깨에 고정되어 있던 은호의 시선은 목, 턱, 입술을 지나 눈으로 옮겨졌다. 초록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여자의 눈동자는 위아래로 찢어져 있었다. 마안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사람의 눈을 보는 것은 얼마만의 일인가. 사람보다 활자에 몰입하게 되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때부터 사람의 시선을 자꾸만 피하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시선을 가로막혔기 때문이라고 은호는 생각했다. 물론 은호가 보고 있는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반강제적으로 시선이 고정된 은호는 일 초가 일 분처럼 느껴졌다. 발끝부터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직 잡혀있는 옷깃을 타고 한기가 느껴졌다.
“역시나…. 너, 박쥐요괴를 만났구나. 편아연 맞지?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이 눈을 알아볼 수 있는 인간은 요력에 감화된 인간뿐이니까.”
숨이 턱 막힘과 동시에, 은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감을 느꼇다. 이 소동이 일단락되겠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어느새 여자의 표정은 풀려있었다.
“아연이를 아세요?”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왔다.
“그래. 온 요괴에 소문이 나버려서 말이지. 나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여기에서 숨어 사는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야. 아, 물론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은 아니야.”
여자는 은호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훌ㅌ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렇게 갑작스레 말을 꺼내봤자 무슨 영문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아연이가 왜 인간계로 넘어왔는지는 들었니?”
“요술을 시도하다 실패했다고 들었어요. 분명 오작술이라고….”
“응. 오작술. 그런데 아연이가 오작술을 사용한 것은 맞지만, 실패하지는 않았어. 단지 요령도 경험도 없어서 착지에 실패한 것이지. 아연이는 학교에서 성적도 우수하고 요술도 훌륭히 해내는 친구야. 그리고 오작술은 이름처럼 거창한 요술은 아니야. 인간계와 요계는 종이 한 장을 두고 마주 본 것과 같아서, 그 한 장을 넘나드는 데는 어려운 기교가 필요하진 않아.”
“그렇다면 왜….” 은호의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사실, 아연이 사는 마을은 까막까치 마을이야. 까막까치 사이에 박쥐인 아연의 가족은 인간계로 치자면 이민족과 같아. 요즘 같은 시대에 대놓고 차별하는 요괴는 없지만, 암암리에 억울한 일이 많았겠지. 특히 애들이 더 심하잖아. 그렇게 아연이가 가출해서 인간계로 넘어오고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자 아연이가 학교에서 괴롭힘이 받았다는 게 밝혀진 거야. 가해자들은 요괴왕의 어명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치되었지만, 아연이 그 자리에 없으니 찾아야지 뭐. 그래서 내가 너희를 찾은 거야.”
여자는 말을 잠시 끊고 은호의 목덜미로 쑥 고개를 가져다 댔다. 은호는 깜짝 놀랐지만, 움직이지 않는 편이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던 여자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영리한 아이야. 보통 요괴는 주위에 본인의 냄새를 뿌리고 다니기 마련인데, 이걸 말끔하게 지워내니 말이야. 솔직히 너희들을 찾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아연이가 한 살만 더 많았어도 못 찾았을걸?”
은호는 매일 밤 아연이 은호를 바라보며 부리던 요술을 떠올렸다. 그건 요계로 넘어가기 위한 요술이 아니라, 은호에게서 본인의 자취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나보다.
“이 정도 말했으면 내가 누구인지는 알겠지. 많은 시간을 주진 못해. 네가 이때까지 잘 보살핀 만큼, 바른길로 돌려보낼 기회를 줄게. 실패한다면 오늘 밤에는 강제로라도 아연을 데리러 갈 테니.” 고개를 끄덕이는 은호의 눈동자로 여자의 마안이 거울처럼 비쳤다.

곧바로 은호는 걸음을 옮겼다. 자취방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먼저 은호는 후배에게 전화로 양해를 구해 마술부 동아리방에서 마술도구를 챙겼다. 후배는 조만간 전화할 줄 알았다면서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그 후 자취방 근처 붕어빵 포차와 문방구에 들렸다. 문방구에서 물건을 사고 구석 자리에서 마술도구를 꺼내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직 해도 지기 전이니 분명 아연은 놀이터 벤치에 있으리라. 준비를 마친 은호는 한 손에 도구를 든 채 놀이터로 갔다. 가슴이 요동쳤다. 순수한 꼬마들 앞에서 공연할 생각을 하니, 첫 무대에서의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 방에서 마술도구를 집었을 때부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연습을 했지만, 실제로 시연하는 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실수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괜스레 손에서 땀이 났다.
역시나 아연은 여느 때와 같이 벤치에 앉아 꼬마들의 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꼬마 무리의 구성원들은 매번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동네 무리라는 게 그런 것이리라. 은호는 일부러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섰다.
“아연아~!”
놀이터 한복판에서 딱지를 치던 꼬마들까지도 은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어린 꼬마들이지만, 한 번에 많은 이목이 쏠리니 은호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치미를 떼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붕어빵 봉투를 꺼냈다. 천원에 네 개. 아연은 그런 은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 하나 먹어. 붕어빵이야.”
은호는 이어 몸을 돌려 꼬마들을 부르며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도 와서 하나씩 먹으렴!”
딱지치기로 이미 들떠있던 꼬마들은 눈치 보는 기색도 없이 신나서 우르르 달려왔다. 은호는 꼬마들에게 하나씩 붕어빵을 물려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미간을 구기며 묻는 아연에 은호는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붕어빵을 입에 물고서는, 은호는 코트 주머니에서 흰 장갑을 꺼내 쓰며 조금 떨어져 있던 아연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가 꼬마들에게 말했다.
“자, 여기 비어있는 붕어빵 봉투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종이봉투의 내부를 앞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어 품 안에서 또 다른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사용한 적 없는 새 봉투입니다. 보이는 대로 이렇게나 빳빳하지요. 여러분들, 붕어빵 하나씩 더 먹고 싶지 않나요? 그렇담 이미 먹었던 봉투를 잔뜩 구겨서 이렇게 하면….”
은호는 새 봉투에 기름이 묻은 헌 봉투를 넣고서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움직임을 탁 멈추니, 봉투는 흔들기 전보다 더 묵직해진 것 같았다. 놀랍게도, 내부엔 따끈따끈한 붕어빵일 같은 개수만큼 들어있었다.
“짠! 새로운 붕어빵이 나타났습니다!”
와와, 굉장해, 또 해주세요, 등등 환한 반응이 나왔다. 만연한 웃음을 지으며 은호는 봉투를 아연에게 건넸다. 아연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꼬마들은 아연에게 우르르 다가섰다.
“저기 아연아, 나도 하나만 더 주라.” “나도 또 먹을래.”
아연은 은호와 꼬마들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더니 이내 하나씩 붕어빵을 건넸다.
“여기 받아.”
은호는 그런 아연을 보며 잠시 기다렸다가, 아연이 모두 나누어주자 다시 연극 조로 꼬마들에게 말했다.
“다시 주목해보세요~. 마지막은 저의 든든한 조수, 편아연 양이 도와줄 것입니다.” 은호는 품에서 까만 주머니를 꺼내 아연의 손에 건네고는 아연의 뒤에 서서 말했다.
“아연이 손에는 지금 속이 비어있는 까만 주머니가 있습니다.” 아연은 눈치 있게 주머니 내부를 꼬마들에게 보여주었다. 나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제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있습니다. 하얀 손수건을 손에 쥐고, 아까처럼 마구 흔들어 위로 던지면…!” 검고 긴 요술봉이 날아올랐다가 은호의 손에 잡혔다. 이어 봉을 이용한 묘기와 꽃피우기 마술을 이어 선사한 은호는 무언가 도구가 나올 때마다 까만 주머니에 하나씩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주머니를 드느라 고생했던 아연이의 손을 넣어보겠습니다. 아연아.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지 꺼내 볼래?”
아연은 머뭇머뭇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부장이 준 복주머니였다.
“귀정… 이 은색 자수… 범의 털이에요.”
“응. 그 안쪽도 한번 열어볼래?” 조심스레 아연이 열어본 빨간 복주머니 안에는 딱지가 서너 개 들어있는 캡슐이 있었다.
“열어봐. 이건 그냥 주는 선물이야.”
꼬마들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서 아연은 캡슐을 열었다. 캡슐 안에는 형형색색의 고무 딱지들이 있었다. 석양에 비쳐 아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저, 같이 놀아도 될까요?”
“물론이지. 오늘은 원 없이 놀고 와. 끝나면 집에 데려다줄게.”
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되돌아섰다. 아연이 처음 보여주는 미소였다. 꼬마들 중 대장 역할의 아이가 아연의 옷깃을 잡았다. 아연은 꼬마들을 따라가며 은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은호도 손을 들어 답했다.

4
아연이 집으로 돌아가고 반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은호는 졸업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에 자소서와 면접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 격주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 들리는 곳이 있었다.
“선배, 오셨어요?”
어두운 실내 계단극장 한편에 마술부 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먼저 온 후배와 여타 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양손에 들고 있던 비타민 음료를 내려놓았다. 한편에 두면 알아서 빼내어 마실 터였다.
오늘은 매 학기에 한 번 있는 마술부 정기공연 날이다. 아직 준비할 면접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지난 반년간 가르친 부원들의 소중한 무대를 그냥 넘기긴 미안했다. 은호도 나름 무리해서 낸 시간인 만큼, 무대 뒷풀이에 참석하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리라.
공연이 끝날 무렵 은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후배와 인사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후배도 그런 은호를 이해한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곧바로 은호는 자취방으로 걸음을 떼었다. 학교 돌담을 따라 걷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자 은호의 빌라가 보였다. 저 방도 곧 비워내야 하겠네, 하며 옥탑방에 걸린 하현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린 그림자 하나가, 아니 자세히 보니 그림자 둘이 옥상 달빛에 비쳐 보였다. 걸음을 멈추니 그림자 중 하나가 팔 하나를 크게 올려 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호도 크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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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병영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입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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