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장도
·2022. 7. 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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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지지했던 정당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잇달아 참패했다. 나를 따랐던 정치인들은 몇몇을 빼고 대부분 선거에서 떨어졌다. 오래 나와 함께 일했던 참모들 태반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는 것 같았다. 시민으로서 성공할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현직에서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랑받고 싶었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 훌륭한 시민으로 살고 싶었다. 그럴 자신이 있있다.
정치를 함으로써 이루려 했던 목표에 비추어 보면 처절하게 실패한 사람이다.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시민으로 성공해 그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런데 대통령을 할 때보다 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는 어떤 기회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실패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실패일 뿐, 다른 누구의 실패도 아니다.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무현이 진보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덮어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노무현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 출세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내 뜻을 접었다. 장인어른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판사 발령을 받지 못하기에 그러는 것이 아닌지 어머니가 의심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내 고집대로 했다가는 두고두고 아내가 죄도 없이 원망을 들을 것 같아서 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2. 꿈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출퇴근하면서 고급 일식집 대신 시장통 국밥을 먹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하면서 참담한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있는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신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국회의원회관 사무실로 수도 없이 많은 격려 전화가 왔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계보원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면 이익을 챙겨 줘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공정성을 잃는다. 한두 사람을 챙기는 대가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계보를 챙기고 개인적 이해관계로 사람을 묶어 둔다고 해서 정치를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도자는 공정해야 한다. 신뢰, 헌신, 책임, 절제와 같은 덕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기택 대표와 일하면서 이런 것을 배웠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반면교사라고 한다.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이런 풍토를 바로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무엇보다 먼저 공무원들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공무원들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고 그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일을 시작했다. 장관 발령을 받자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왔다. 친한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 충고했다. "공무원들이 장관 하나 길들이는데 서너 달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조심해라." 이런 경고는 경고대로 접수하면서도 편견을 버리고 공무원을 만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의심 많은 리더는 조직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 나중에 속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믿고 일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바른 판단이었다. 대통령을 할 때도 그렇게 했다.
#3. 권력의 정상에서
진보 세력은 지역으로 갈라져 있고 이념으로 분화되어 있다. 돈 있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단체가 별로 없다. 진보적 시민 단체조차도 기업의 지원을 얻지 못하고 언론이 외면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튼튼한 정책 연구소도 거의 없다. 그런데 보수의 나라에서 진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얕게 뿌리내린 작은 나무에 너무 많은 과일이 매달린 형국이다. 두 차례의 대선 승리와 10년의 집권도 보수와 진보의 불균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의 격차는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의 자산 규모 차이만큼이나 크다.
내 카드를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때론 좋은 협상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략은 이익을 나누는 협상에서나 쓸 수 있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를 협상할 때는,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도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북핵 문제 협상은 본직적으로 이익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협상이다.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전략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나라 당은 한 술 더 떴다. 야당이 국회에서 더 강한 압박과 실질적인 제재를 요구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하면 보수 언론들은 그것을 머리기사로 다루어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면서 또 대통령과 정부를 흔들었다. 만약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에 대한 증오와 대결주의를 조장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아무 대책도 없이 정서적 반감과 증오만 생산하는 그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북한과 미국 행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대통령이 국정원장과 독대해서 다른 누구도 모르는 정보를 보고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정원의 정보 집중력은 더욱 강해진다.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를 바라는 정보를 자발적으로 국정원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정원의 정보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권력은 강화된다. 예를 들어 장관들의 업무 성과와 주요 정책,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보고에 포함된다고 하자. 장관들은 국정원장 독대 보고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처의 고위 공무원들은 그 보고 내용을 좋게 만들기 위해 자진해서 국정원 조정관에게 비공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면 장관들은 불안해진다.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몰라서 불안하다. 대통령이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해서 불않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대통령의 심기를 헤아리는데 골몰하게 된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말을 받아적게 되고 대통령이 깊은 검토 없이 말한 단순한 의견도 대통령의 '깊은 뜻이 담긴 지침'으로 받아들인다. 보고를 할 때 대통령의 눈치를 살핀다. 다양한 현안을 다루는 관계장관회의에서도 토론을 하거나 대통령의 이해도를 높이는 창의적인 보고를 하기보다는 대통령의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보고를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분권이니 자율이니 하는 것은 모두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만다.
청와대를 떠난 후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했던 기업인들이 숱하게 특별세무조사를 당했다. 검찰 수사까지 받아 회사가 망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다르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말하는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려 했던 나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아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할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4. 작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5. 에필로그: 청년의 죽음
내가 아는 그는 연민과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평범한 변호사 노무현을 양심수와 노동자를 돕는 인권 운동으로 인도한 것은 그 어떤 빛나는 이념도 아니었다. 정의와 생존권을 지키려고 싸우다 박해 받는 동시대인에 대한 소박한 연민이었다.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혼자 안온한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시대를 외면하려 했을 때 가슴 밑바닥을 때린 수치심이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를 시작했다. 나에게 그는, 그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고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시민
한창 검찰개혁이 화두에 올랐던 18년도 무렵 사서
그로부터 3년 뒤 군 입대를 하고서야 읽었던 책이다. 그리고 이제야 정리를 한다.
이보다는 앞서 16년도 즈음 문대통령의 '운명'을 읽었다.
접어둔 페이지는 많지만 아직도 방치된 채일 것이다.
그것도 정리해야하는데...
기록물을 참 많이 남겨서 그럴까,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까.
본인이 쓴 자서전이 아닌데도 그의 사상이 그대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듯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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